제주 햇감자의 진심, 제주 올가 유기농 감자 산지에서

By on 5월 13, 2013

가마솥 뚜껑을 들어올리자 부엌 안이 금세 하얀 김으로 가득 찼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밥 위에 콕콕 박힌 건 노오란 감자. TV 앞에 앉아 <양희은의 시골밥상>을 보고 있자니 탄식에 가까운 혼잣말이 나온다. 아~, 나도 저 뜨거운 감자 한 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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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맛을 알 나이
중학교 때인가, 감자 좋아하는 그 애가 고구마가 좋다는 날 보고는 턱 끝을 들어올리며 거만하게 “너 아직 어리구나”라고 말할 적에도 남들 다 자장면 먹을 때 어른인척 하려고 우동이나 짬뽕 먹는 애들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달달한 고구마에 비해 감자는 심심하고 덤덤했다.
그러니까 고백하건데, 감자볶음, 감자조림, 감자샐러드를 좋아하는 내가 양념 속에 감춰진 진짜 감자 맛을 알게 된 건 어느 만큼 나이가 들고나서다. 특히 갓 쪄낸, 껍질이 쩍쩍 갈라져 뽀얗게 분이 오른, 포근포근한 감자는 햅쌀로 잘 지은 밥에 버금간다. 하지만 매번 맛있는 감자를 고르고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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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야생초와 함께 나고 자란다
지난 2월 중순, 강원도에 “100년 만에 최고”라는 폭설이 내린 그 날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 차로 한 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섬 아래쪽 끝에 있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방풍림 사이로 난 오솔길을 타고 들어가자 어느 순간 탁 트인 하늘 아래 너른 밭이 펼쳐졌다. 서울과 달리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다. 양배추밭과 감자밭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했는데, 저건 양배추고 그럼 감자는?
혼디작목회 강종필 씨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지푸라기 같은 것이 줄지어 쓰러져 있고, 그 주변은 풀만 무성하다. 마른 줄기가 박힌 흙 속을 파자 비로소 우리가 아는 감자가 나타났다. 줄기 끝에 올망졸망 달린 통통한 감자알. 난생 처음 햇볕을 본 이 귀여운 햇감자의 껍질은 뜻밖에, 촉촉하고 말간 노오란 빛이다. 독한 제초제 따위 단 한 방울도 묻히지 않은 이 곳 감자들은 이렇듯 제주의 온갖 야생초, 야생화와 더불어 평화롭게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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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까지 먹어야 진짜 감자
감자처럼 많이 먹고 즐겨 먹는 작물도 드물 것이다. 먹는 법도 다양해서 존재하는 거의 모든 방법으로 요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알칼리성 식품이고 생김과는 달리 풍부하게 든 비타민C는 가열해도 살아있다. 감자 속에 든 칼륨과 단백질은 껍질 안쪽에 몰려있으니 껍질 째 먹는 것이 좋다. 물론, 유기농 감자라면 먹는 마음이 한결 든든할 것이다.
사시 사철 먹는 감자이지만 그렇다고 제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에서부터 온 감자는 고향의 기후와 가장 닮은 곳을 찾아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돌며 재배된다. 보통 봄에는 중부, 더운 여름에는 서늘한 강원도와 경북 고랭지에서 재배되고, 쌀쌀한 가을에는 남부와 제주, 특히 겨울에는 제주에서 주로 재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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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촉촉하고 보드랍지요!
제주는 강원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감자가 많이 나는 곳이다. 따뜻한 제주에서는 일년에 두 번 심고 수확한다. 가을에 심어 겨울에 수확하고, 이른 봄에 심어 이른 여름에 수확한다. 강원도 고랭지 감자가 유명하다지만 제주 감자의 인기도 그 못지 않다.
제주 감자가 유난히 포근포근하고 맛있는 건 역시 맑은 공기와 물, 특히 제주에만 있는 칠흑같이 검은 화산토 덕이다. 강종필 씨는 제주 감자의 맛을 “모이지 않다”라고 표현한다. “난 다른 감자는 목이 막혀서 못 먹겠어요. 우리 제주 말로는 ‘모이다’라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허허.” 제주 감자의 대부분은 ‘대지’라는 품종으로, 촉촉하며 전분이 많은 ‘수미’보다 더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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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품은 감자싹, 독 품은 감자싹
이곳의 감자들은 9월 5일에 심은 것으로 12월에 첫 수확을 했으며 길게는 4월까지도 거둘 수 있다. “감자밭에 눈이 쌓여도 얼지 않아요. 4월까지 땅 속에 두어도 괜찮고요. 제주의 흙이 자연 냉장고 역할을 합니다.”
감자는 씨감자로 파종한다. 살짝 분이 나올 때까지 말린 씨감자를 통째로 심거나 생장점을 기준으로 서너 토막으로 잘라 심는다. 특히 혼디에서는 겨울에 수확하는 감자는 통감자로 파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것은 파종 후 씨감자의 부패율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생장점이란 감자 싹이 나는 바로 그 자리다. 신기하게도 햇빛을 받으면 초록색으로 변해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독을 품지만, 흙 속에서는 싹을 틔워 맛있는 감자알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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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겹 두 겹…, 검은 화산토를 덮은 감자알
우리가 먹는 감자는 정확히 말하면 감자의 덩이줄기 부분이다. 덩이줄기란 땅속에 있는 줄기 끝에 양분이 모여 큰, 땅속줄기를 말한다. 그래서 감자는 여느 밭 작물과 달리 볼록하게 솟은 두둑이 아니라 이랑과 이랑 사이 낮은 골에 심는다. 수확 전까지 감자알(덩이줄기)들이 햇볕을 받지 못하도록 몇 차례 흙을 올려주다 보면 어느새 흙이 수북이 쌓여 골은 높아지고 두둑은 낮아져 있다.
흙 속 씨감자에서 싹이 트고 줄기에 잎이 달리고 꽃망울이 맺히고 꽃이 피는 사이 땅속 덩이줄기(감자알)는 토실토실 살이 오른다. 어느 순간 줄기와 잎의 성장이 멈추고 누렇게 변하기 시작해 마침내 바싹 마르면 수확해도 된다는 신호다.
대 하나에 적게는 두 알, 많게는 다섯 알까지도 달리는데 수가 적으면 알이 크고, 많으면 알이 작다. 작건 크건 감자 맛은 똑같다. 올가로 나가는 것들은 너무 작거나 크지 않은 적당한 크기로, 무게로는 약 80그램~100그램 정도로 출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품질’을 따지다 보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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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치를 아는 지혜로운 감자 농부
올해 감자 수확량은 예년만 못하다. “작년 9월 중순까지 계속 비가 왔어요. 감자 심은 후에는 가물었고, 수확을 시작할 12월 초에는 또 비가 많이 왔고요. 태풍도 잦았고 눈도 많았습니다.”
유기농 감자 재배에 있어 가장 큰일은 병해로 더뎅이 병으로 인한 피해는 더욱 커졌다. “비대기(덩이줄기가 양분을 흡수하며 크는 시기)에 가물다가 비가 오면 감자 껍질에 검은 딱지(더뎅이)가 생겨요. 딱지 때문에 품질이 떨어지죠. 올해가 특히 더 심합니다.” 맛이나 영양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딱지 때문에 감자의 운명은 순식간에 퇴비나 거름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상기온이 심각해질수록 약에 대한 유혹은 더욱 강렬해질 것이다. 하지만 강씨는 “친환경 농업이야말로 환경 오염을 줄이는 길”이라고 단언한다. “지나친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은 토양 미생물이나 천적을 감소시켜 생태계를 파괴합니다. 수질오염과 농산물의 잔류농약 문제는 우리의 건강까지 위협하죠.” 당장의 편리가 돌고 돌아 재앙이 되어 당도할 곳은 결국 우리 아이들의 미래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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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도 보도 못한 유기농법에 반하고
농부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정부에서 운영하는 대학수준의 농업전문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유기농을 시작한 건 90년대 말 무렵부터다. “우연한 기회에 유기농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학교 다닐 때는 듣도 보도 못한 내용들이었으니까요.” 짓고 있던 감귤 농사를 당장 유기농법으로 바꿨다. 첫해에 나온 감귤은 모두 내다버려야 했다. “하기만 하면 돈이 된다고 했는데 아니었어요.(웃음)”
3년째 되던 해부터 형편이 나아져 택배 판매를 시작했다. 못생긴 유기농 감귤의 재배과정을 적은 편지를 써서 넣었더니 불평 불만 대신 재구매가 쏟아졌다. 그의 감귤은 서귀포 쪽에서 첫 번째로 유기감귤 인증을 받았다.
표선면에서 친환경 농업하는 사람들을 모아 혼디(‘함께’라는 뜻의 제주 방언) 혼디작목회를 만든 그는 자신이 재배하는 작물뿐 아니라, 친환경이 되어야 할 거의 모든 일들에 관심이 많다. 가장 기본이 되는 교육은 먹거리 교육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연이 모체가 된 친환경 농업의 생산과정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친환경 농업은 먹거리 운동이자 생명운동이고 환경운동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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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 막을 올가 유기농 제주 감자
올 봄에도 어김없이 황사가 찾아왔다. 예보에 의하면 더 잦고 더 강력해질 거란다. 몸 속에 들어온 황사 먼지를 없애는데 돼지고기보다 더 좋은 효과를 내는 건 감자다.
제주의 온갖 야생초들로 뒤덮인 감자밭을 보고 나니, 젊고 건강한 칠흑같이 검은 흙을 보고나니, 올가의 ‘유기농 제주 감자’라면 지금은 물론 다음에 닥칠 황사로부터도 우리를 지켜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퐁퐁(‘모락모락’의 제주 방언) 피어 오른다.

글. 한정혜 (자유기고가)
사진. 톤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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